작성일 : 14-12-06 08:17
#2. 번역능력은 선택능력이다.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356  
[번역이란 무엇인가] 번역능력은 선택능력이다.

"번역사는 첫째, 하나의 원문을 번역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을 생산해 낼 수 있어야 하며,
둘째, 그중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번역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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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번역의 과정을 일련의 의사결정과정(decision making process)으로 설명한다. 이는 번역을 번역이 단어 대 단어의 치환 작업이라고 여겼던 과거의 인식과는 큰 차이점을 보인다. 번역을 단어 치환작업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사전만 있으면 누구나 번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어로 쓰인 소설이나 계약서를 아랍어나 러시아어로 옮기려 하는 번역사에게 아랍어 사전이나 러시아어 사전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번역의 과정이 일련의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라고 할 때 번역사가 내려야 하는 결정의 범주는 언어적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프랑스의 소설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라는 소설의 첫 부분을 번역가 이세욱이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는 자기 퀸을 조심스럽게 전진시킨다 대모갑(玳瑁甲)테 안경을 쓴 이 남자는 체스 세계 챔피언 자리를 놓고 〈딥 블루 Ⅳ〉라는 컴퓨터와 대결을 벌이고 있다. 장소는 영화제를 비롯한 국제적인 행사가 자주 열리는 칸의 페스티벌 궁전이다. 바닥이 펠트로 덮인 대형 강당에 행사장이 마련되었다.

위의 지문은 소설의 초반부, 사람과 컴퓨터 간의 체스 대결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이다. 일단 독자들은 한국어 번역본의 '대모갑테'라는 용어를 낯설게 느낄 것이다. 한국인 독자에게는 국어사전을 찾아 보아야 할 만큼 익숙지 않은 단어이다. 번역사는 소설 도입부에 등장하는 이 단어를 단순히 '뿔테 안경'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한자표기를 병행하지 않고 '대모갑'이라고만 번역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의미를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대모갑이란 '바다거북과인 대모의 배갑인판(背甲鱗板)의 표면을 싸고 있는 얇은 반투명층으로 누런 바탕에 검은 점이 찍혀 있음'이라고 역주를 달아서 설명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번역자는 역주를 달지 않고 괄호 안에 한자표기를 병행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선택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역자의 선택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하여는 말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역자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는가의 문제이다.

위의 번역서를 읽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친절하고 상세하게 달려 있는 역주의 양에 놀라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대모갑테'에는 역주를 달지 않았을까? 꼼꼼히 역서를 살펴본 독자는 '대모갑테'가 이야기의 전개에서 역주를 필요로 할 만큼 중요한 요소가 아니며, 반면 역주 처리되어 있는 다른 요소들의 경우 가독성을 방해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역주를 달 만큼, 번역사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정보들이 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모갑이라는 단어는 단지 한자어를 병기하는 정도로만 설명해도 무방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논리적 사고를 거쳐 최종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온전히 번역사의 몫이며, 이러한 결정은 '언어적' 차원을 전적으로 넘어서는 것이다.

언어능력과 지식만으로 번역이 가능하다면 전문가시스템이 사람보다 번역을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사람이 기계보다 번역을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능력, 즉 이와 같은 '전략적 선택 능력' 때문이다. 전략적 선택 능력은 한마디로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이를 자체적인 성찰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다. 번역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유형은 무한히 다양하다. 아무리 유연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기계라 해도 인간이 '입력하지 않은' 새로운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반면 인간은 무한히 다양한 번역 상황 속에서 그만큼이나 다양한 번역 문제에 봉착하여 이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번역의 과정은 한마디로 끝없는 문제해결의 과정이며 선택의 과정인 것이다. 호주 출신의 번역학자 핌(Pym)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번역사는 첫째, 하나의 원문을 번역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을 생산해 낼 수 있어야 하며,
둘째, 그중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번역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더 이상 단어 대 단어의 치환, 혹은 통사·구문적 지식에 대해 언급하지 않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번역이 기계의 번역보다 우수한 이유는 기계와는 달리 '적절한 번역을 선택하는' 자체적 판단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IT기술이 현재와 같은 속도로 발전을 거듭한다면, 언젠가는 지금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문제해결 능력을 보유한, 그래서 우수한 품질의 번역을 생산하는 보다 완전한 프로그램을 만들게 될 수도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손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자동번역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기계가 인간 번역사를 완전히 대체하게 될 것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오히려 기계번역에 맡겨지는 것은 번역작업에서 전적으로 반복적이거나 기계적인 부분들이 될 것이다. 특히 단순한 전문용어가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텍스트들의 경우, 기계번역은 이미 충분히 그 몫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나머지의 부분, 즉 번역능력의 핵심인 선택과 결정을 필요로 하는 작업은 전적으로 인간 번역사에게 맡겨지게 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번역능력은 선택능력이다 (번역이란 무엇인가, ㈜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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